This future furniture has a past
사람은 가구와 더불어 산다.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은 골동품이 아니라도 예전 것들이다. 퇴계와 율곡 같은 분이 쓰던 유래 있는 문갑이 아니라도, 어느 조촐한 선비의 손때가 묻은 대나무로 짜서 옻칠한 문갑이다.
먹글씨를 아니 쓰더라도 예전 벼루와 연적이 하나 있었으면 한다. 세전지물, 우리네 살림에는 이런 것들이 드물다. 증조 할머니가 시집때 가지고 온 것, 이런 것이 없는 까닭은 가난한 탓도 있고 전란은 겪은 탓도 있고 한군데 뿌리를 박고 살지 못하는 탓도 있다.
그리고 오래된 물건을 귀중히 여기지 않는 잘못에도 있다. 유서 깊은 화류장롱이나 귀목 받닫이를 고물상에 팔아 버리고 베니어로 만든 ‘단스’나 ‘캐비닛’을 사들이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교체를 잘 하는 사람들이다.
서양 사람들은 오래된 가구나 그릇을 끔찍이 사랑하며 곧잘 남에게 자랑한다. 많은 설명이 따르기도 한다. 파이프 불에 탄 자국이 있는 마호가니 책상. 할아버지가 글래드스턴과 같이 유명했던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더 길어진다. 자동차 같은 것을 해마다 바꾸는 미국 가정에서도 ‘팔라’에는 할머니가 편물을 짜며 끄덕거리고 앉아있던 ‘로커’가 놓여있다. 흑단, 백단, 자단의 오래된 가구들. 이런 것들은 우리 생활에 안정감을 주며 유구한 생활을 상징한다.
사람은 가도 가구는 남아있다.
화려하여서가 맛이 아니다. 오래가고 정이 들면 된다. 쓸수록 길이 들고 길이 들어 윤이 나는 그런 그릇들이 그립다. 운봉칠기, 나주소반, 청도 운문산 올달솥, 밥을 담아 아랫목에 묻어두면 뚜껑에 밥물이 맺히는 안성맞춤 놋주발, 이런 것들조차 없는 집이 많다. 이런 것들이 없다면 우리네 살림살이는 한낱 소모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